초판

비틀즈의 'yesterday' 초연을 상상해 본다. 신곡 yesterday를 처음 접하는 공연장의 객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음악이란 사실 가상의 공간 그러나 유일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아마 그 당시 객석의 사람들은 전대미문의 곡이 될 신곡에서 '역사적 인식'을 획득했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성서'라는 사전 정보를 잊은 상태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어나가면 불현듯 초판의 한 독자가 혁명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역사적 인식'을 상상하게 된다.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수수께끼가 과학적으로 풀려나가는 과정(물론 그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진 않다)은 인쇄물 자체로도 감동이다. 어차피 '자본'은 전제를 한다. 표면에 나타난 이면의 사실적(!) 운동을 누구의 입장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전제. 그래서 맑스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소위 노동계급의 처지를 현실적으로 참을  수 없었던 일방적인(?) 인간이다. 우물가로 다가가는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맑스의 말마따나 자본가도 현실만 바라보지만 이론도 현실을 바라본다.

웃어라

오늘 일기는 미래 어느 날 내가 이 일기를 보게 될 때를 대비해서 적는다.
이 일기를 1년 아니 10년 후에 보게 되더라도 그 때의 나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혹은 즐거울지라도 무슨일이던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이 일기를 읽으면서 웃어라.
(1990년 1월 14일 日)

임꺽정

홍명희의 임꺽정.

작당이 되기 전의 어설프고 착한 도둑이 많이 등장한다.
홍명희는 이들의 도둑행각을 밉지 않은 해학으로 늘어 놓는다.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처음보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거의 없다.
심지어 양반까지도 사람 그 자체를 믿는다.
아니, 믿는다기보다는 불신이란 개념이 애초에 없다.

곳곳에 급진적인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예를들면, 남성의 성(姓)을 대물림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거나.

조선 삼재(三才) 중, 아니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재능 중,
신채호와 함께 교과서의 맨 첫 머리에 올려야 할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주마등

어느 영화에서 자신이 죽지 않을 근거로 "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지 않았다."라는 대사를 한다.
내 어린(?) 시절을 보낸(결코 바치지는 않은 것 같고) 회사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니 회사원으로서의 나는 31일자로 확실히 죽을 모양이다.

내가 무엇을 할지 나보다 남아 있는 동료나, 선배, 고위간부들(ㅋㅋ)이 더 잘 알고 다양하니 역시 말 참 많다.
조직 생활을 오래 하면 결국 내 안에 있는 타인의 시선에 많은 눈치를 보게 되는데, '나'를 바라보는 타인은 단 1초 정도만 '나'에게 집중한다는 그 사실은 머리를 털게 하지만, 내 안에 있는 타인은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간이동이 필요하다.

가면

 회사(이제 前 회사로 부를 날도 2주정도 남았다) 동기 중 전임 사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통해(구체적으로 어떤 권모술수를 썼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른팔이 되다시피한 놈이 있다.
당연히 동기중 가장 빠르게 팀장이 되었다.

 원래부터 사립초등학교 출신의 부유층이기도 해서 씀씀이가 크긴 했지만
근래에는 (소문에 의하면)회사돈을 그 특유의 썰과 잔머리로 마음껏 유용하여 겉 씀씀이가 더 번드르했다.(업무적으로 그가 추진하던 프로젝트는 결국 많은 손실을 입혔다)
결국 씀씀이를 감당하지 못했던지 사기꾼과 야합하여 몽매한 대중들에게 불법을 저지르다
현재 구속 수감중이다.

사내에서는 철저하게 노조에 냉소적이었고, 공금을 유용한다고 고발된 팀장을
변호하기에 바빴고, 회사돈으로 유흥을 즐기기 바빴다.
그런 놈에게 그의 손위 친위부대 임원급 간부들은 사규를 위반하고 현행범에게
퇴직금을 고스란이 내주었다.
(물론 그의 재정이 번드르한 겉과는 달리 말이 아님을 이번에 알게 되어 약간 짠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 친위부대 팀장이 나에게 탄원서 비슷한 걸 써 달라고 했다. (내가 글을 잘 꾸민다나)
나는 거부했다.
철저하게 약한 자들을 짓밟고, 발가락 사이에 낀 머시기 만도 못하게
대우했던 인간에게 그리고 개인적인 탐욕에만 눈멀어 많은 대중들에게 피해를 입힌
현행범에게 무슨 동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거부의 방법은 나도 인간관계를 생각해서 다분히 농담처럼 웃으며 다른 사람이
적임자임을 강조하는 형태였다.
이것이 한 달 전 쯤 일이다.

오늘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결국 나에 대해 뒷말이 많았단다.
너무 칼 같이 옳고 그름 혹은 인정머리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 아닌가 정도의 말들.
자칭 '빨갛다'는 놈들은 정내미가 없다는 수준의 말들.

예상되는 반응이었고 예상되는 발언 수준이었다.
내가 그렇게 용산 참사 후원에 한 푼이라도 후원하라고,
학생인권조례에 서명해달라고 해도 코웃음치던 사람들이 인/정/머/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人情'이란 어떤 人 이며 어떤 情 인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공적 영역의 '인간과 비인간의 맥락'을 대면접촉의 익숙함의 가면으로 가릴 필요가 있을까.

나와 아주 가끔 술도 하던 그 친구에게 나도 마초S 혹은 조폭 의리같은 동정심은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의 선악은 오직 공공성의 개념에 근거할 뿐이다.

타자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자 담임선생은 어머니에게 거의 저주에 가까운 협박을 했다. "저런 애가 잘 되는 것 한 번도 본적 없습니다."  그리고 반 친구들에게는  로 삼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고 한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자 사무직 노동자외에 다른 삶은 없는 것처럼 내가 회사에 어떤 불만이 있는지 추적하기 바쁘고 두 아이의 아빠의 삶을 팽개친다고 혹평한다. 이들에게 '타자'는 역시 비정상적인 사람일 뿐이다.

독설

'독설'로 알려진 시사인 기자 고재열과 나는 정말 코딱지 만큼의 인연이 있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몇년 같이 다녔다. 내가 선배이고 그는 두 해 후배이며 나는 9학기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갔기 때문에 아마 신입생시절부터 그를 언뜻 봤을 터이다. 내 기억으로 그는 진지한 미소와 함께 항상 말수가 별로 없었던 친구였다.

여러 과정은 생략하고... 시사저널 싸움과 독설닷컴등을 보면서 이만한 기자라도 어디냐, 싶었던 친구였다.
그리고, 나도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다.

기자로서의 그의 필요성(?)은 둘째치고,

그 진지한 미소와 말없음속에 -삼성자본에 맞서던 강건한 무엇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고 감탄했던- 명망가의 욕망(좋은 면도 있는 부분)과 정상적인(?) 남성이라면 나이가 들어갈 수록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하고 수정하게 되는 평등한 성정치의 문제가 마초적으로 화석화되어 있었다. 유해진을 루저들의 희망으로 부르는 그의 순간적인(물론 개그적인 판단) 생각자체 혹은 그 찰나의 순간이 그 화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진데.(개그를 다큐로 보지 말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개그와 다큐는 같은 거울의 다른 이름임을 본인도 잘 알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내면화된 대중들의 그 내면을 깨트리지 않고, 그 표면적인 욕망만을 충족시킬 뿐이다. MC몽 사건에 대해 MC몽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연예기자들이 쉽게 입에 담지 않는 것을 명망있는 기자가 비아냥거려줌으로써(절대 독설이 아니라) 이미 자해 군기피자로 찍힌 그에 대한 대중의 단세포적인 욕망을 배설케한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독설의 절대치인데, 나는 그것이 독설로 보이지 않는다. '한 싸가지 없는 연예인의 군기피'로 인식하며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하는 것이 무슨 독설인가. 독설은 금기에 대한 지독한 비아냥아니던가. 그 '국방의 의무'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독설이지 않나.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 'New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도취되어 자신의 반대를 '안티'로 설정하는 어이없는 발상이 그의 그 진지한 미소와 말없음에 들어있었다니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와 같은 기자가 필요도 할 것이다. 마치 유시민 처럼.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나 유시민이 어쩌면 그들이 쉽게 비아냥대는 한나라당 패거리들 보다 훨씬 어려운 상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