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비틀즈의 'yesterday' 초연을 상상해 본다. 신곡 yesterday를 처음 접하는 공연장의 객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음악이란 사실 가상의 공간 그러나 유일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아마 그 당시 객석의 사람들은 전대미문의 곡이 될 신곡에서 '역사적 인식'을 획득했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성서'라는 사전 정보를 잊은 상태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어나가면 불현듯 초판의 한 독자가 혁명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역사적 인식'을 상상하게 된다.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수수께끼가 과학적으로 풀려나가는 과정(물론 그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진 않다)은 인쇄물 자체로도 감동이다. 어차피 '자본'은 전제를 한다. 표면에 나타난 이면의 사실적(!) 운동을 누구의 입장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전제. 그래서 맑스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소위 노동계급의 처지를 현실적으로 참을  수 없었던 일방적인(?) 인간이다. 우물가로 다가가는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맑스의 말마따나 자본가도 현실만 바라보지만 이론도 현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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