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노동계급의 성서'라는 사전 정보를 잊은 상태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어나가면 불현듯 초판의 한 독자가 혁명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역사적 인식'을 상상하게 된다.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수수께끼가 과학적으로 풀려나가는 과정(물론 그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진 않다)은 인쇄물 자체로도 감동이다. 어차피 '자본'은 전제를 한다. 표면에 나타난 이면의 사실적(!) 운동을 누구의 입장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전제. 그래서 맑스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소위 노동계급의 처지를 현실적으로 참을 수 없었던 일방적인(?) 인간이다. 우물가로 다가가는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맑스의 말마따나 자본가도 현실만 바라보지만 이론도 현실을 바라본다.
결말
어제는 팀 소통(팀 회식의 다른 말인 것 같다)을 위한 예산낭비를 했다. 새로운 대주주의 경영철학(ㅋㅋ)에 따라 팀원들의 소통을 중요시 한단다. 매월 일인당 배정된 금액은 역시 우리가 요구하는 임금인상과 맞 먹는다.
홍대 노조문제에서도 드러났듯이 역시 자본(소자본이던 대자본이던)은 돈 몇푼때문에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다. 생산의 사회성, 공공성 이런 것들이 거세된 철저한 사적 소유(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것)의 '지멋대로'를 재정립 하는 것이다.
총파업까지 이끌어 내고 결국 '지멋대로' 되지 않음을 확인시켜야 겠지만, 나 자신 이 회사의 내 일과 사람들에게 더 이상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다. 결국 그만두고 싶은 회사에서 쟁의가 발생했다. 등을 돌릴 수 없는 어설픈 상황이다.
결말이 뭘까?
사노련
어제 있기로 했던 사노련 1심 선고가 어떻게 됐나? 아직 보도를 접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긴 했지만 이전의 공안 재판과는 달리 외형적인 정치적 맥락없이
말 그대로 별다른 현실적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의 '생각'에 대한 판결을 법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야 당연히 이 재판을 무사히 우리 사회에 통과시키면 줄줄이 압박하겠다는 정치적 포석일 터이다.
미국의 수정헌법 1조가 마치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대한 것으로 들먹이지만
현실속에서 법은 언제나 법 그자체를 수호하려고 하지 '인간'을 수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권력자들은(독립선언문을 작성했던 그 백인 노예소유주들로부터) 자신들만의
법을 수호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속여 왔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수정헌법 1조가 힘없는 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수 많은 판례들을 만들어 왔다.
결국 아래로부터 요청된 헌법은 그들에 의해서 수호되지 못했다.
하워드 진은 법보다 인간을 수호하기 위해서 실정법을 어기라고 말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국가에 대한 굴복으로 본다)
사노련 재판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현주소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결과와 무관하게 현주소를 모르나. 어차피 생산현장의 (신)자유주의 그 자체도 자유와 무관한 독점이고, 사상또한 대학에서조차 자유롭게 시장에 올려놓고 경쟁시키지 않는 독점 아닌가.
이제 남은 것은 독점에 반대하는 생각만으로 범죄자가 되는가 아닌가 일 뿐이다.
회사가 경제사범같은 사람의 M&A로 시끄럽다. 노조는 준법투쟁을 하자고 한다.
경제사범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고 동료들의 외면을 뒤로한채
해고의 길을 갈지도 모른다.
세분화되고 꽉 짜여진 지금세상이 60년대 공민권운동/반전운동을 하던(마르크스적 전망을 가진) 대쪽같은 미국 지식인의 말이 단지 '멋있게만' 들린다.
용산
처가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용산참사'의 현장이 있다.
(벌써 2주기라고 한다. http://mbout.jinbo.net/index_2.php )
사람(사실은 자본이)이 사람을 죽이고도 한쪽은 버젓이 외국으로 띵가거리면서 나가고
또 한쪽은 죽은 사람들을 둘러싸고 대책위다 후원회다,,건수마다 다 있다.
물론 이런 표현은 그들과 우리(?)를 기계적인 객관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문득 지루하다는, 개별적인 시간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잘 되어 있다는 서구의 복지정책도 오랜 시간의 계급투쟁의 결과임을 역설하곤
하지만, 크게 보아서 미군이전 관련한 용산 개발의 조그만 이익을 나눠가진 길 건너
처가와 우연한 web-surfin'에도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나오는 많은 후원계좌에
피곤함을 느낄 때가 있다.
딴지
별다른 대책도 없으면서 요즘 들어 자꾸자꾸
여기까지 다니고 그만두어야지, 라는 배부른 생각이 든다.
그것은 회의 때마다 윗분(?)의 의견에 울컥하고 약간은 대드는 현상으로 드러나곤 한다.
정규직으로 사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현대차 비정규직(사실은 정규직으로 판명난)의 파업을 보고 있노라면
비정규직의 월급따위의 비용 발생이 결코 문제가 아니라(현대차에서 코딱지 만큼도 안되지 않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철저한 분리를 통한 포섭과 통제라는 21세기식 자본의 전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회사의 정규직들은 이미 비정규직들과 이해가 다름을 확실히 보여준다.
우리의 법이라는 것이 그나마 '정규'에만 해당되는 것이므로
'비정규'를 '정규'로 인정해달라는 호소는 우리에게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지극히 '무례한' 혹은 '위험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한국 정규직 장년 남성(가부장적 표현으로는 가장)으로 할 수 있는 약간의 인간적인 '딴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혹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래 사이트로 가서 실질적인 후원이라도 생각해 보시기를.)
2010 노동자 대회
2010년 노동자대회(전태일 40주기)
근로기준법을 안고 있는 여성 노동자와 동지애 가득한 얼굴로 붉은 머리띠를 나눠주는 무대의
남성 노동자의 그림보다는(왜 조명좋은 중앙무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서울을 온통 도배하고 있는 'G20'과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김연아'와 누구에겐가 하트를 그리고
있는 '한효주'따위에 대한 인간적이고도 지적인 혐오감이
아날로그적인 집회의 집단황홀경에 감흥케한다.
세습
말 그대로 '자유로운' 성과 혼인관계가 정상적이었던 '미실'의 시대이후,
배타적인 '피내림'을 통한 권력생성의 종교시대를 거쳐
피의 배타성이 이성적(계몽의 그 단어)이지 못한 낡은 것으로 상식화된(좌파던 우파던) 현재,
최고 권력자를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둔 이십대 청년의 '권력세습'은 그 배경과 역사를 차치하고
'현상적'으로 안타까울 뿐이다.(대부분은 키득거릴테고)
과연 최고권력자는 체제유지라는 대의와 사적인 권력의 문제를 필연적인 톱니바퀴로 보고 있는 것일까.
몇 개 재벌이 대한민국 생산의 50%이상을 초독과점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공공연히 이십대 아들(!)에게 권력 세습을 하고 있는데, 그 배타적 피내림(혹은 봉건적 종교의식)을 흘러간 코메디로 큭큭대지 않는다. (몇몇은 '법'이라는 이성으로 그들에게 맞섰지만 영주와 기사들의 안하무인에 제압당했다)
우리는 이미 몇 세대에 걸쳐 '몇가지 먹을거리의 있고 없음'으로 북쪽과 남쪽의 차이를 이해하도록 배워왔다.
타협
'주류'라는 경계는 배타적 타협의 산물이다.
코미디 같은 불방 해프닝 일주일 후 방영된 PD수첩 '4대강..'은 그야말로 그 타협을 잘 보여준다.
이미 많은 '비주류'언론이나 전문가(이들 중에 이색적으로 주류 전문가도 많다)들에 의해 대가리가 있다면 어이없는 사업으로 지적된 것의 50%수준에도 못 미치는 문제 의식과 자기 검열.
(자기 검열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주류에의 미련을 의미한다)
결국 'PD수첩'을 이 정권에 대한 공중파의 마지막 보루(케이블이 있기는 하나)인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그 정도 수준에서 '타협'하는 배타적 주류들의 행태를 보여줄 뿐이다.
민주주의의 싸움같지만 절차에 대한 주류들 간의 반목일 뿐이다.
그리고 평범한 수요일이 되고, 대부분의 비 주류들은 속수무책으로 하루를 살고, 그 비주류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미미하다.
이 정도 방송 쯤이야,로 마무리짓고, 강은 계속 파헤쳐진다.
감수성
무정부적인 생산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평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막아내기 위한 한 방법으로 '상대적 과잉인구' 즉 요즘 말로 비정규직의 비율을 높이는 이 고전적인 '자본'의 정책적인 관점에서 보면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들어서 조금 재미있는 일은 있다.
이전의 권력자와 그 주변 떨거지들이 추잡한 이권에 개입되더라도 대개 일반인은 '부인'으로 일관하는 결과만 잠깐 보게 되고 '그 놈이 그 놈'의 감정으로 일축해버리고 그 세밀한 '감수성'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대개 정치인들의 가치관이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야말로 그 '세계'을 디테일하게 보기는 힘들었다.
요즘에 보면 그 디테일한 '감수성'을 읽게 만드는 일이 많다. 예를 들면 권력이란 헌법상의 주권자들을 대놓고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뿌려버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는 '우리는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수준의 표정들을 '당당하게' 짓는다. 권력이란 권력이 없는 사람앞에서 당당해야 한다는 '감수성'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다. 조전혁 콘서트 하겠다고 나름 '거물'정치인들이 모이는 걸 보더라도.
연예인의 사생활처럼 그들만의 디테일한 삶을 바라보는 대다수는 어이없기 보다 그 자리에 같이 있고 싶어한다. 요즘의 권력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소수의 '울화통'은 즐길 뿐이다. 그러나 그 소수가 잠깐 다수가(이 다수는 예전처럼 그들이 숨어서 해먹기를 바라는 수준이다) 될 수도 있는 위기에 몰렸다. 그래도 길들여진 감수성을 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왜 다수가 되는지도 잘 모를지도 모르고.
칼칼
한반도 대운하가 4대강사업으로 바뀌면서 민간사업이 국책사업으로 전환되어 속도전은 용이하게 되었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즉 경제적으로는 토건자본이 주요 이윤을 창출하는 지대차익을 발생시키지 못함으로 결국 재정적자(공황)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들이붓는 예산운용(그것이 세금이기에)은 불가능 할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산이나 갯벌과 달리 강의 맹렬한 복원력은 이제와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고 가면 갈 수록 그 반대가 더욱 심해지리라는 것이다. 강은 시멘트를 걷어 내기만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생태적 특성이 강하다. 결국 대선은 4대강 대선이 될 수도 있고 정권 재창출이 위험할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이상 우석훈의 칼럼 내용이다.(우석훈은 조금만 자기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의 단상으로부터 내려놓으면 좋을 텐데,,하지만 위 칼럼처럼 망루에 서지 않는 우석훈이 신파조가 아닌 냉정하게 해야할 일이 있다)
박정희의 18년이 MB에게 없기에 경북고속도로에 기반한 우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은 치적을 공유할 수 없다는 소아적 권력자의 떼처럼 속도전으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2010년에 그 집단의 내부에서조차 국풍81식 사고를 하는 자들만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불만을 불평해대지 그들이 '권력 소아병'이 있다는 것은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다' 안다.
4대강 즉 대운하가 완공 되었을 때, 그리고 수십년이 흘렀을 때 비록 갖가지 논쟁이 있지만 박정희 수준의 우상화라도 가능할 것인가. 일단, 대운하는 완공 후 없어질 것이 틀림없다. 생태를 파괴하고 그 부작용이 가시광선으로 목격되는 상황에서 다음 권력자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입만 뻥긋대도 추방인 현 상황이 지나면 정권유지가 힘들다고 목까지 차오른 한마디 하고 싶은 약간 머리가 있는 꼴통들이 스탈린 격하를 무색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파가 권력을 잡으면 머리가 있고 없고가 상관 없을 테고.
우리 세대에 꼴통들의 정권을 저지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거지로 경쟁이 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 틈에서 또 우리는 아주 지리한 어떤 선택을 또 강요받을 지도 모른다. 그 전에 나부터 보다 칼칼해져 있어야지.
기타
실제로 연주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기타'라는 물건을 선망하고, 열광하고 몸서리쳐왔다. 우리 나이에 음악 좀 들었다는 사람치고 게리 무어의 'parisienne walkways' 라이브에서 울던 기타연주(사실 기타 자체는 대단한 기교는 아닌데,,개인적으로 필 리뇻의 블루지함으로 인해 시너지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에 대한 추억은 다 갖고 있을 것이다. 비비킹이 아끼던 '루씰'의 브랜드는 알아도 그것을 누가 만들었나는 솔직히 우리의 추억에 없다.
불법파업과 공장폐쇄가 자행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여전히 투쟁중이다. 이번 일본 후지 락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아 참여한다고 한다. 두 말할 필요없는 톰 모렐로나 잭 더 라 로차의 투쟁정신은 여전하고 그들 역시 '음악은 예술가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라는 슬로건에 강한 연대를 보이며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동자의 전문적인 솜씨로 실컷 돈 벌어서 이제는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는 자본의 그 '세계화'속성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만, 한국의 기타 연주자들(이한철등 몇몇 빼고)과 기타에 열광한다는 그 헤드벵잉 족속들은 이런 일에도 발끈하지 않는다면 직접 밥줄에 반찬이 줄어들어야 한국영화 살려달라며 곱게 기른 머리 삭발하는 해프닝이나 벌일 것인가. http://cortaction.tistory.com/
함몰
선거 당락의 인적개편에 따른 현실적인 제도-민주당 시의원들에 의한 서울광장 조례건 정도는 상장되지 않겠나- 변화의 유의미함을 인정하지만, 그 당락에 함몰되는 것은 惡이다.
내가 그나마 진보신당에 투표하는 것은 명백한 의사표현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선악을 비교검토한 바 없다. 선거로 도대체 어디까지 무엇을 바꾸고자 하는 것인가. 한 때 나와 배경과 출신이 같다고 오해한 노무현을 찍어대는 국민(나도 그 국민)에 환호한 적도 있었다. 가당키나 한 일이었나.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3%의 진보신당 지지율(민주노동당의 지지율까지 포함해야 하나. 민주노동당과 지지의 차이는 그 간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이 올라가 있는 상황이어야 선거 당락의 함몰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 우리는 이명박스타일 참 싫다는 수준이고, 최소한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적인 절차들은 암묵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수준이다. 다음 선거에 진보신당이 해체되고 없을 지라도 반자본의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자라면 한나라와 민주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3%를 진보의 씨앗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현실은 지리멸렬함을 인정한다. 진보주의자(이런 표현이 어디있나)는 국민윤리같은 억지 희망을 운운하지 말고 갈길을 가면 된다.(힘들다고? 심상정은 살아오면서 이 길이 힘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탐욕과는 다른 사욕을 버리기가 참 어렵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내가 투표한 사람이 당선되었다. (곽노현)
댓글
천안함 관련하여 박노자가 '보복하지 말것'을 요구하는 글을 레디앙에 썼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22 )
천안함 북한 소행을 백번 인정한다하더라도 양 국이 전면전을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지적인 군사적 보복이란 결국 늘 그렇듯이 가진 것 없는 양 국 젊은이들의 희생만이 일어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문제는 박노자 글이 아니다. 그 댓글 중 하나이다. 댓글이란 원래 쓰레기같은 것들이 많긴 하지만. 박노자는 한국에 대해서 그만 이야기했으면 좋겠단다. 분위기상 그도 자칭 좌파임이 틀림없을 것이고 박노자의 논리적인 비약등에 열받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러시아 출신의 백인 한국인인 박노자는 틀림없이 한국인이다. 한국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감정적인 결론의 근저에는 당연히 그가 외국인(백인)이며 오슬로에 살고 있다는 심리가 깔려있다. 그 심리의 밑바닥에는 '한민족'이라는 익숙한 피의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명박에게 한국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민족'의 기원을 따지는 역사적 논쟁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 임을 무의식적으로 자랑스러워 하는 순간, 자칭 좌파도 김문수식 드라마틱한 결론으로 치달을 수 있다.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한명숙 찍기를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그나마 '양심적인' 동료들 사이에서 내 삶의 밑바닥을 까발리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건 그렇고 60명의 목숨이 사라졌음에도 집행유예 5년 정도일 천안함 사건의 책임을 거의 사형선고감에 가까울 정도의 정보차단과 즉흥적인 거짓말에 거짓말로 사건을 확대시키는 사람들이 매우 어설프고 치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 정권은 이를 인정하겠다면서 잇속이나 차리고 우리 국민을 얼마나 가소롭게 키득거리면서 안하무인으로 주한 미군 범죄같은 것을 또 저지르겠나.
월요일 야유회
출근할 때 딱히 듣고 싶은 음악이 없으면 CBS라디오를 듣는다. (원래 CBS는 다른 방송사들보다 '말'이 없어서 듣게 되었는데 지금은 너무 똑같은 '음악'에 질려있다. CBS에 음반이 꽤 있을텐데..) 그 시간에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의 멘트 내용이나 어감은 애들 학교 보내고 난 '전업주부'들과의 수다쪽에 가깝다. 아무튼..
오늘 어떤 사연에서 '야유회가는데 사고없이 잘 마쳤으면 좋겠어요'라고 한다. 진행자는 월요일부터 야유회를 가다니 '회사의 배려'가 참 훌륭하다고 말한다.(사실 금요일은 야유회없어도 편안하고 토요일 야유회는 휴식이 아니라 '일'이기 때문에) 듣고 있던 나도 회사의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월요일에 있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은 '회사의 배려'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멘트를 받아들인다.
'자본의 교묘한 차원의 노동력 재생산 시간'으로 '월요일 야유회'를 '자본의 정교한 음모'로 한마디로 오버할 필요까지야 없겠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회사의 정책이란 현실수준에서 우리의 자발적(사실상 무의식적인) 무관심(다른 표현으로는 동의)에 의한 것이 훨씬 많다. 그 결과는 회사가 그 정책을 살짝만 넘어서도 '수혜'로써 감사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 정책을 살짝 넘어서려고 할 때 '이래도 되나'는 자기 규제에 시달리게 된다. 자기 규제는 단순히 눈치 보기 차원이 아니다. 고용 당한 사람의 지극히 無産者적인 '과잉 사용'의 불편함이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경험에 의해 이미 노/자의 지난한 힘겨루기의 결과로 나름 법제화되어 있는 부분 조차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과잉으로 인식한다. 소유관계에 입각한 오너가 아직까지 크게 경영에 개입하지 않고 민주노총산하의 노조가 있는 우리 회사조차 '과잉'에 대한 자발적 인식이 지배한다. 나 같이 '칼같이' 권리를 주장하고 실행한다고 믿는 사람조차 동료들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으로 역시 '과잉인식'에 결과적으로 동참하곤 한다. 노조의 '칼 같은'은 지침으로 과연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회사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설정 속의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극히 추상적으로.
augmented reality
아이폰 출시 이후 소위 'app'열풍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고한다), 뭐 사실 당연히 예상되었던 것일 뿐인데 하면서도..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준주변부 한국의 지극히 원자화된 개인들의 주머니속으로 역시 예상했던 대로 모든 것을 소유한 초국적 자본의 폭격이 '오픈마켓'이란 이름으로 이른바 철옹성 같은 '무선시장'에서 '쌈지돈'을 꺼내게 만드는 선방을 날렸다. (그 속에서 늘 그렇듯이 몇달 새에 26억원을 벌었다는 어느 가난한 앱개발자의 성공 신화가 dream을 노래한다) IT업계 관련 연구소들과 기업들은 각종 세미나를 통해 저렇게 손안 대고 코 푸는 돈벌이가 있나, 라며 미친듯이 전망을 내놓고 전력 점검을 하고 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application 무이익 정책이 몇 걸음 앞서 나가고 있다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장미빛 미래의 '증강 현실'이 디바이스 없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나오미 클라인이 [노 로고]에서 제기하는 '각개격파의 허브화'(물론 일관된 이론 혹은 흐름에 대한 스스로의 문제제기도 있다)를 심화시킬 소통의 혁신일까. 일단 생산력 혹은 기술의 발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체공학'과 '로봇공학'과의 접목을 논외로 하면 사실상 최신 디바이스를 통한 무선기술이 최후의 진화일진데, 아이폰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그 이상도 현재로선 그려질 수 있다. 피자 토핑을 자기 마음대로 꾸며 주문하는 모바일 주문의 혁신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겠지만, 반자본주의의 편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는 나 같은 사람들-정서적 운동권이라 불러도 좋다-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싶은데, 예를 들어 버마행동의 난민신청에 대한 인권운동과 버마민주화운동지원이 각개격파속에서 이명박의 4대강의 큰 이슈와 허브로 연결될 수 있는 게릴라적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본다던지. 내가 무슨말을 하고 있나.. 한마디로 나도 아이폰을 사서 트위터를 하고 그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원자들의 이합집산과 각개격파의 장으로 나가야 하나..라는 것이다.(설마 초국적기업 애플의 아이폰 불매운동을 하자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
사족,
좀 우습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하지만 IT기술의 '상상력 수준의 발전'이 범IT업계의 노동 강도를 강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