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나온 1965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감각으로는 제목과 영화가 동떨어진다. '살인마'가 내포하고 있는 공포 혹은 잔혹의 이미지는 익명성을 근저에 깔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철저하게 가족 관계의 소극이고 실제로 '魔'로 불릴 살인도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이야 이용민 감독의 공포영화들이 재평가 받는다고 하지만 만들어질 당시 제목은 아마 헤프닝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양이 살인' 정도면 운치가 있겠다.
50년 전의 공포영화에서 공시적인 시각적 테크닉을 기대하지는 않으므로 '살인마'의 시각적 잔혹함은 오히려 색다른 영화적 재미가 된다. 도금봉 선생의 뺨에 붙은 시루떡(벗겨진 피부를 표현함)은 유쾌와 잔혹의 어디쯤에 있다. 동시대 영화와 비교해도 영화 초반(절반) 공포의 '현상'(뒷 부분은 그 기원)부분의 시나리오는 상식 수준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참 공포의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낯선 여자가 문을 두드리고 아이들이 문을 열어준다. '아줌마 누구세요?' '그건 차차 알게 돼'(이 부분에서 빵 터졌다) 그러고는 바로 식모가 된다.(나중에 이 아줌마는 보살의 환생으로..) 이예춘은 아이들이 귀신에게 잡혀갔는데(죽었는데) 절에서 어머니가 돌아왔다고 웃음을 머금기까지 한다. 철저하게 그 '장면'만 생각한 결과다.
그럼에도 이용민 감독의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재평가 하는 것은 영화 초반의 압도적인 두 장면 즉 텅빈 미술관의 공간에 의한 공포와 미친년 날뛰듯('널뛰듯'은 이 말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귀신들이 숲속을 부유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의 독특함이 곳곳에 튀어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설픈 가발(가발아닌가?)만큼이나 어설픈 연기의 이예춘 선생도 오동통한 섹시 가련 도금봉 선생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뭐라해도 '전원일기'의 할머니 정애란 선생이다. 등장 회수도 가장 많을 뿐 아니라 공포의 핵심이자 파격의 핵심이다. 콧수염 붙인 남궁원과의 여성 상위 베드신을 필두로 Flashback의 주동자(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며느리를 그 며느리의 친척동생으로 갈아치우는, 친족으로부터 자유로운)를 거쳐 캣 우먼까지.
나름 영화광이었던 어머니가 이 영화를 동시대에 보셨을까.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 개봉 실적이 바닥이라면 시골 도시에는 개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영화 전성기의 다양성의 증거로 호출되기도 하지만, 유신시대를 살았던 많은 시골 사람들이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박근혜에게 표를 준 것처럼 인문학적 맥락과 1초1초의 삶은 평행하게 잘 부르고 불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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