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시대 - 김기현 (1985)

 거의 한국영화사에서 거론할 필요도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는 고만고만한 하이틴 물. 황순원의 '소나기'는 90년대 한국영화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오랫동안 이 영화같은 청춘영화의 원형이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중학 시절,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소나기'류의 슬픔에 몇 일간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의 감성에 이불을 돌돌 말았었다.

 TBC 어린이 드라마의 히어로 전호진('용왕삼태자'로 영원할), 그냥 좋았던(지금 다시 보니 그저그런 신인) 최현미, 80년대 에로의 한 주역 오혜림. 특히 최현미의 극중 이름인 소라는 나에게는 오랫동안 소녀까지만 살다간 여인들의 대명사였다. 이 영화에서 유도부 주장으로 나오는 이희성은 80년대 청춘영화의 뚱뚱 캐릭터의 주연이었다.

 고등학교 휴학 시절, 흉내내듯 글을 쓰고 싶었던 그 시절, 어줍잖게 타자기를 빌려 '소라'를 위한 시를 쓰기도 했다. (여주인공을 위한 또 다른 시는 '호를 위한 맹목'의 주인공 호혜중이 유일했다)

 개봉 당시 서울에서 관람객이 총 420명이었다고 한다. 그 420명도 나처럼 간혹 이 영화를 생각할까. 그러나 다시 보지는 마시라. 지루하다. 그냥 끊어진 필름같은 기억만 간직하시라.

 이 영화를 보았던, 마치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의 그 극장 같은, 시골 고향의 제일극장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 극장에서 매주 새로 올리던 개봉작이나 동시상영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던 그 영화들은 매년 두 차례의 겨울에 찾아오는 목감기처럼 꾸준하게 괴롭힌다.

 유난히 열병을 많이 앓았던 나의 시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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